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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울산의 의로운 함성을 생각한다(울산의 3.1 만세운동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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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울산대곡박물관
작성일자 2018-04-02
조회수 644

4월, 울산의 의로운 함성을 다시 생각한다

 해마다 4월이면 1919년 울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대해 다시 살펴보곤 한다. 울산에서 만세운동은 4월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평소 필자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일어났던 분들을 최소한으로라도 기억해야 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울산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삶을 살았다. 기미년 전국을 만세의 물결로 물들인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울산 사람들도 동참했다. 울산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 2일∼8일까지 언양·병영·남창에서 일어났으며, 그리고 성사되지 못한 온산 만세운동 준비가 있었다.

 울산의 만세운동은 4월 2일 언양 의거로 시작되었다. 천도교인(天道敎人)이 의거를 주도했는데, 언양장에 모인 사람들은 ‘조선 독립’이라 쓴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 독립만세’·‘조선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장에는 울산 군내의 언양·상남·중남·삼동·두동·두서 면민이 모여 있었다. 일경이 총을 발사해 사상자가 생겼다. 일부 인사는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언양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3.1운동 사적비’를 작천정 입구에 세웠는데, 2014년 비석을 언양알프스 시장 부근으로 옮겼다.

 일제는 4월 3일 병영장, 5일 울산장의 개시를 못하게 했다. 병영 의거는 4월 4일~5일 병영청년회가 주도했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경상좌병영)이 있던 이곳 주민들은 예로부터 상무(尙武) 정신이 강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곳 청년들은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항일 의지를 가졌다. 청년들의 결속단체로는 병영청년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4월 4일 청년회원들은 병영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대한국 독립만세’라 쓴 기를 걸고, 축구공을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국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점차 만세 대열은 늘어났다. 4월 5일에도 ‘한국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했다. 이틀 동안 일경의 총격으로 4명이 희생되었다. 여러 사람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현재 병영 삼일사(三一祠)에는 병영 만세운동에 참가한 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당 입구에는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지은 ‘삼일 충혼비’가 있다. 그런데 이 비문에서 의거 날짜는 하루 늦은 4월 5일·6일로 적혀 있다.

 4월 8일 온양읍 남창에서는 학성이씨 문중이 주도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남창장에서 ‘대한 독립’이라 크게 쓴 기를 흔들며 ‘한국 독립만세’·‘대한 독립’을 외쳤다. 일경은 총검으로 해산시켰으며, 여러 사람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렇게 울산지역 세 곳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주도층이 뚜렷이 구분되며, 만세 구호도 조금씩 달랐다는 특징이 있다. 운동의 열기는 모두 대단했다.

 한편 만세운동으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온산에서도 만세 준비가 있었다. 온산읍 당월리의 김인석은 당시 울산공립보통학교(현 울산초등학교) 학생으로, 13세였다. 그는 울산 여러 곳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4월 15일을 의거일로 정해 태극기를 만들어 나누어 주는 등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온산면장의 밀고로 일경에 붙잡혀 불구가 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그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울산 만세운동에서 소년 김인석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4월이 다 가기 전에 울산의 의로운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하며, 울산의 저력을 느껴보았으면 한다.(신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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